최소한의 밥벌이 리뷰

최소한의 밥벌이를 읽었습니다.

최소한의 밥벌이 – 미래는 회사 밖에 있다

모든 것을 돈으로 측정해왔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의 욕망이 거의 비슷해졌다. 남녀노소 똑같은 욕망을 지닌 인간이 되고 말았다. 한심한 노릇이다.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 쇠락한 근대국가의 끝자락을 사는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 그런 생활방식에 익숙해지고 만 것이다.하지만 그런 사회에서 이제 조금 벗어나자. 벗어나려고 행동하자. 생각만이라도 좋다. 그냥 슬쩍 벗어나보는 거다. 온 힘을 다해 도망치겠다는 게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 한쪽 발을 담근 채, 내 인생의 중요한 부분만 다른 곳으로 벗어나보는 거다. 그렇게 산다면 어떻게 될까? 이 책은 그렇게 살아본 내 실험의 기록인 셈이다.

글쟁이는 결국 ‘보따리장수’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손수 기른 채소를 등에 지고 전철에 올라 도시로 팔러 나가는 근교 농촌의 아주머니들처럼. 글쟁이 역시 마찬가지다. 아니, 똑같아야 한다. 자기 기획을 등에 지고 편집부를 찾아다니며 판다. 품질이 좋으면 팔릴 테고, 형편없으면 다시는 찾지 않는다. 그러면 끝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우선 각자가 내키는 대로 재미있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다. 지금의 사회를 그런 사회로 바꾸고 싶다. 회사에서 기를 쓰고 생존 경쟁을 벌이고, 주택 대출을 갚느라 허덕이며 대량으로 소비되다가 그렇게 죽어가는 사회와 우리가 만들려는 사회. 어느 쪽이 더 재미있겠는가?”

그러면 지금 일본을 뒤덮은, 앞날이 안 보인다는 느낌은 실체가 없다는 소리인가? 쓸데없는 걱정인가? 아니다. 이 꽉 막힌 느낌은 미국 빈곤층이나 중국 산골 농부와 비교해서 느끼는 게 아니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자기 부모와 비교해 절실하게 느끼는 감정이다.

최소한의 밥벌이 –

– 하루 한 시간만 일하는 삶

“농사를 지으면 굶어 죽을 일은 없다.”

정직원이라는 자리에 매달려, 아무 의욕도 의미도 없는 일을 하며 건강도 삶의 기쁨도 잃어간다. 너무 바쁘고 지쳐서 평소 좋아하던 영화나 책을 즐길 여유도 없다. 피곤한 몸으로 퇴근해 집에서 보는 것이라고는 텔레비전과 스마트폰뿐. 왜 이렇게 살까? 결국 굶어 죽는 게 무서워서 아닐까? 뒤집어 말하면, 굶어 죽지만 않으면 되는 거 아닌가? 사람은 쌀만 있으면 어지간해서는 굶어 죽지 않는다.

인생이란 현실과 타협하는 일의 연속 아닌가. 그러나 연봉 200~300만 엔 정도밖에 받지 못하면서도 야근 수당이 없는 잔업을 100시간씩이나 한다. 그렇게 일하고도 “부가가치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사람은 연봉 100만 엔이라도 어쩔 수 없다”는 소리까지 듣는다. 그런데도 힘들게 손에 쥔 정직원이라는 자리는 포기할 수 없고, 포기하고 싶지도 않아 아등바등 매달린다. 오늘을 살아가는 선택지가 기껏해야 이 정도뿐일까? 우리 사회가 언제부터 이렇게 가난해졌나?

내가 주장하는 삶의 방식은 그런 자본주의 시스템에 더 이상 끌려가지 말자는 거다. 자본주의의 맛있는 부분만 빼먹자는 거다. 

절대로 한심한 인간이 될 수 없어    쓸데없는 콤플렉스를    심으려고 해봐야 안 돼    날 감쪽같이 속인 줄 알아?    그런 유치한 수법으로    감쪽같이 속인 줄 알아?    그런 시대는 이제 끝났어    너무 웃겨 어처구니가 없군    네 정체는 들통났어    - 티어드롭스(TEARDROPS)■, 〈감쪽같이 속인 줄 알아?〉

스타일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스타일이야말로 전부다. ‘멋지다’라는 것은 가볍게 던질 수 있는 말이지만, 절대 하찮게 여겨선 안 되는 문제다. 내 알로하셔츠가 객관적으로 멋진지 아닌지는 여기서 전혀 중요하지 않다. 내가 멋지다고 생각하면 그뿐. 그걸로 충분하다.

최소한의 밥벌이 – 도시 남자의 얼터너티브 농부 생활

“그래, 채소건 뭐건 다 그런 거야. 자기 손으로 키우면 점점 예뻐 보여.”

혁명이고 유토피아고 개나 줘라. 내가 하려는 일은 그저 ‘자본주의라는 괴물에 맥없이 묶여 살아서는 진짜 내 인생이라고 할 수 없다’는 가설을 스스로의 실험을 통해 확인하려는 것이다.

힘겹게 살아가는 젊은이나 실업자가 거리에 넘쳐날 때, 전쟁이라도 일으켜 밖에서 활로를 찾아야 하지 않겠냐는, 경기가 좋아진다면 전쟁이든 뭐든 하자는, 근근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포자기에 빠질 때 전쟁에 대한 분위기가 형성된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미식가’라고 떠들고 다니는 놈들이 너무 싫다. 사내 주제에 맛이 있네, 없네 지껄이지 마라. 여하튼 매일 따스한 밥만 먹을 수 있어도 굶어 죽지는 않는다(영양이야 균형이 맞지 않을 테지만).    우선 각자가 굶어 죽지 않을 것, 이게 모든 것의 출발점이다. 그러기 위한 나름의 얼터너티브한 실천이 ‘하루 한 시간 아침 농사’인 것이다.

논은 ‘상품’만 만드는 게 아니다. 블랙기업에 착취당하지 않도록 해준다. 인기 없는 글쟁이나 뮤지션, 배우, 작가, 화가, 운동선수, 누구든 상관없다. 초등학교 졸업 문집에 적은 장래희망을 좆으며 살아도 먹고살 수 있도록 해준다.

최소한의 밥벌이 – 하기 싫은 것을 하지 않고 살아갈 자유

지적인 일은 인간을 인간의 공동생활으로부터 떼어놓는다. 몸을 쓰는 일은 거꾸로 사람을 다른 사람들 쪽으로 이끈다. 작업장이나 정원을 손질하는 일을 할 수 없게 된 것이 아쉽다.    - 구스타프 야누흐■, 《카프카와의 대화》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말했다. 이미 원시시대부터 인간사회는 주인과 노예로 계급이 나뉘어 있다고. 노예는 주인을 위해 매일 노동에 종사한다. 그러기 위해 노예는 매일 ‘죽음에 대한 불안’에 노출되어 있어야 한다. 죽음에 대한 불안은 인간사회의 바탕을 이루는 근본 계기다.    만약 인간에게 그런 불안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아마 질서나 노동도, 부의 축적이나 권력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존재해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죽음에 대한 불안’에서 시작된 노동이 ‘참고 견디는 일’이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문제다.         

최소한의 밥벌이 – 글쓰기와 벼농사의 세 가지 공통점

직업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지 30년. 이제 겨우 깨닫게 된 사실이 있다. 문장을 쓰기 전에는 내가 무얼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문장을 조립하면서 겨우 ‘아,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나’ 하며 놀란다. 생각이 있어 문장이 정리되는 게 아니라 거꾸로다. 문장이라는 내 커다란 꼬리에 휘둘려 내 생각을 깨닫게 된다.    그런 내 생각을 어떻게든 ‘상품’이 될 만한 수준으로 갈고닦아 정리하고 포장까지 한 다음 편집자에게 보여준다. 가격표가 붙을 때도 있다. 운이 좋으면 독자에게 닿는다. 독자가 되어준 분들이 웃거나 우는 일도 있다. 뜻밖의 기쁨이다.

그러나 나는 사명감이랄까, 의무나 책임감 때문에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 즐겁다. 떨린다. 문장을 쓰고 있을 때만은 불타오른다. 타올라라, 타올라라, 뼈까지 타올라 새하얀 재가 될 정도로 다 타버리고 싶은 것이다.

사람은, 회사는, 사회는 부를 축적해야만 한다. 축적하지 않으면 살아갈 자격이 없어진다. 그리고 노동자는 언제 어느 때건 교체 가능한 톱니바퀴가 되어야만 한다. 누구와도 교체 가능하고 또 얼마든지 쓰다 버려도 되는 저렴한 톱니바퀴. 아주 사소한 잡무라도 노동자는 결국 ‘I would prefer not to’라고 ‘거절할 힘’을 잃어간다. 수당을 받지 못하는 잔업이 당연해져간다. 그게 세계화니까. 인도나 중국 노동자들과 경쟁하며 살아가야 하니까.

‘삶이란 돈으로만 움직이는 게 아니다, 이대로 가면 자본주의는 막다른 곳에 이르고 말 것이다’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새로운 농본주의는 근대적인 욕망을 가라앉히고, 자기가 사는 곳을 소중하게 여기는 애향심이 중요하다며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일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노동은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런 노동 현장에서 자신의 삶을 떳떳하게 살아내고 있는 어른은 과연 몇이나 될까. 대부분의 사람에게 노동이란 굶어 죽지 않기 위해 하는 것, 감수해내야 할 것, 될 수 있으면 하고 싶지 않은 것, 그런 것이 되고 말았다. 

최소한의 밥벌이 – 지속 가능한 밥벌이를 위하여

‘세속적인 욕망을 버리고 자연의 품에 안겨 살아가라’고 백날 떠들어봤자 고리타분한 설교일 뿐이다. 자기가 진짜 좋아하는 일, 이게 아니면 삶의 의미가 없는, 자기 인생을 걸 만한 일을 찾아내라. 그리고 그것에 달라붙어 물어뜯다 쓰러져라.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그런 자세의 한 가지 사례인 셈이다. 글을 쓴다는 일에 내 짧은 인생을 걸고 달라붙어 물어뜯다가 쓰러지겠다.

선진국에 태어나면 더는 ‘성장’이라는 스토리를 쓸 수 없다. 당장 지금은 힘들어도 10년 뒤에는 더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다는 생각이 아버지, 할아버지 세대에는 가능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인생 설계를 할 수 없다. 좋고 싫고의 문제가 아니다. 냉엄한 현실이다. 

다들 그렇게 산다고, 그게 인생이라고 회유하는 사람들이 신자유주의자들이다. 굶어 죽고 싶지 않으면 21세기의 룰 아래서 일하라는 것이다. 중국이나 인도의 노동자와 같은 일을 하면 같은 임금을 받고 일하라는 말이다. 이미 노골적으로, 까놓고 그렇게 말하는 카리스마 경영자가 일본에 있지 않은가. 아베노믹스가 말하는 ‘성장 외에 다른 길은 없다’는 슬로건도 신자유주의가 우리에게 들이대는 위협의 또 다른 변주다.    “○○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그러면 펑크란 무엇인가. 단적으로 말하면 DIY 정신. 이거면 된다. 

Do it yourself.

내가 원하는 것이 거기 없다면 스스로 만들어라. 파괴가 아니다. 창조다. 굶어 죽기 싫다면 저임금이라도 감수하라고 노골적으로 압박하는 신자유주의를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생각한다면, 그런 사회를 비웃어주고 벗어나면 된다. 도주. 다른 삶의 장소, 다른 삶의 방식을 찾아떠난다. 이상한 조어기는 하지만 ‘얼터너티브 라이프’다.

이런 세상을 뒤바꾸는 문제는 이 책의 목적이 아니다. 세상은 어느 방향으로건 흘러갈 테지만 좋아질 일도, 더 나빠질 일도 없다. 세상은 늘 추하며, 우리는 기를 쓰고 살 가치가 없다. 그저 이 세상을, 인간사회의 진실을 똑바로 응시하기만 하면 된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조금 자유로워질 것이다.

논에서 돌아오면 글쓰기에 몰두한다. 저녁이 되면 글쓰기를 멈춘다. 서재 창밖, 산 너머 저편, 오무라 만 방향으로 해가 진다. 숲이 우거진 산 너머로 커다란 오렌지빛 태양이 사라진다. 맥주를 한잔한다. 숨이 넘어갈 것만 같다. 정말 아름답다. 이곳 이사하야가 아니더라도, 그 어디라도 시골의 자연 경관은 모두 이렇듯 숙연하게 아름답다. 

고되기는 하지만 몸 쓰는 일의 기쁨과 노동의 의미를 찾을 수 있어서 즐겁고,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기 때문에 자유롭다. 결과적으로 꽤 풍족한 삶이다. 글로벌 대자본에게 이런 사람들은 없애버려야 할 존재다. 그 규모가 극소수라면 무시하겠지만, 이렇게 사는 방식이 만약 큰 트렌트가 된다면 틀림없이 깨부수러 올 것이다. 역사가 증명한다.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