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게 고통일 때, 쇼펜하우어  – 사는 게 고통이다

사는 게 고통일 때, 쇼펜하우어를 읽고 쓰는 리뷰입니다.

사는 게 고통일 때, 쇼펜하우어 – 사는 게 고통일 때

17세에 염세주의자가 된 철학자, 쇼펜하우어

평범한 사람들이 충족되지 않는 욕망에 시달린다면, 넘쳐 나는 부 때문에 아무런 걱정도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은 권태에 시달린다. 따라서 쇼펜하우어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부러워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사람들의 삶을 잘 들여다보면, 누구에게나 사는 건 고통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쇼펜하우어는 민족주의가 위세를 떨치던 당시 독일의 시대적 분위기를 경멸해 마지 않았다. 그는 개인적으로 자랑할 만한 자질이 없는 자들만이 민족적 자부심에 사로잡힌다고 보았다. 개인적인 자부심을 가진 자라면 수백만의 사람이 공유하는 자부심에 손을 뻗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눈물을 흘리며 네게 당부한다. 스스로를 속이지 말고 진지하고 정직하게 너 자신을 다루어야 한다. 네 삶의 행복이 달린 문제야.

인생은 고통과 권태를 오락가락하는 시계추다

우주의 근원적인 실재가 끊임없이 결핍감에 시달리는 맹목적인 욕망의 성격을 띠고 있기에, 거기서 비롯되는 모든 개체도 맹목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서로 투쟁할 수 밖에 없다. 바로 이것이 ‘왜 세계에 악이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해서 쇼펜하우어가 제시한 답이다. 이와 함께 쇼펜아우어는 고통과 악을 완전히 극복하는 길 역시 욕망의 불길을 완전히 꺼버리는 것, 즉 욕망을 극복하고 부정하는 데서 찾는다.

쇼펜하우어는 이해관계 때문에 다른 사람과 다툴 때 상대방을 논리로 설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상대방을 설득하려면 상대방이 이성이 아니라 이익이나 욕망에 호소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타협하면 당신도 이익을 볼 수 있다’라는 식으로 상대방을 설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이성이 욕망에 대해서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욕망의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행복보다는 고통을 강하게 의식하기 때문에, 우리는 행복해지려고 노력하기보다는 고통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가능한 한 제거하려고 애써야 한다. 행복한 인생이란 고통이 없어 견딜 만한 인생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알려면, 그 사람이 무슨 일로 행복한지를 묻기보다는 무슨 일로 힘들어하는지를 물어야 한다. 이는 사소한 일로 인해 힘들어하는 사람은, 사실은 다른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힘들어하는 일이 사소할수록 행복한 사람이다.

권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새로운 자극을 찾아나서는데, 이 때문에 권태가 호기심의 원천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남의 사생활을 기웃거리며 스캔들에 흥분한다. 권태는 또한 사교의 원천이기도 하다. 이는 본래 남을 위하는 마음이 별로 없는 자도 권태를 이기지 못하여 남과 이야기를 나누며 사귀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모든 곡식이 저절로 잘 자라고, 비둘기들이 평화롭게 하늘을 날고 또한 모든 남자가 손쉽게 애인을 얻어 잠자리를 함께 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인간은 얼마 안가 권태를 느껴 죽어버리든가 스스로 목을 졸라 죽어버릴 것이다. 아니면 싸움과 살해를 일삼으면서 지금보다 더 고통으로 가득찬 세상이 될 것이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이 세계가 가장 알맞은 곳이며 우리의 생활방식이 가장 적합한 것이다.

만약 현실에서 모든 욕망을 순조롭게 다 채우고 항상 편안하고 만족스런 삶을 살았다면, 셰익스피어나 괴테는 시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플라톤도 철학을 탐구하지 않았을 것이며, 칸트도 <순수이성비판>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사상의 세계에서 만족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일단 현실에서 절망과 고통을 맛본 후의 일인 것이다.

“인간을 불안하게 하는 것은 어떤 사건이 아니고 그 사건에 관한 생각”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거들먹거리지만, 사실은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능려이 가장 예민하게 발달해 있어서 유난히 고통에 시달리는 동물에 지나지 않는다. 동물은 인간보다 훨씬 단순한 삶을 살면서도 만족하며, 식물은 전적으로 만족한다. 인간도 지적 수준이 낮고 상상력이 적을수록 걱정 근심이 없다. 치매에 걸려 어린아이의 상태로 돌아간 사람도, 그를 돌보는 주위 사람들은 힘들지만 정작 그 자신은 아무런 걱정도 근심도 없이 행복하게 산다.

근대는 역사가 진보한다는 신앙이 지배한 시대였다. 이러한 시대의 한복판에서 쇼펜아우어는 “역사는 진보하지 않는다”고 외쳤다. 헤겔이나 마르크스와 같은 사람들은 역사의 진보를 믿으면서 역사에는 궁극적인 목표가 있다고 보았지만, 쇼펜하우어가 보기에 역사에는 아무런 목표도 의미도 없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채워지지 않는 욕망에 허덕거리는 인간들 간의 무의미한 투쟁과 갈등뿐이다. 인류의 역사는 외면적인 형태는 바뀔지 몰라도 삶의 이러한 진실이 영원히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순환과정일 뿐이다.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말한다. 역사의 장들은 사실상 명칭과 날짜만 다를 뿐이다. 본질적인 내용은 어디에서나 동일하다.

이 세계는 생각할 수 있는 세계 중에서 가장 악한 세계다

쇼펜하우어는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욕망은 궁극적으로는 자기 보존 욕망인 식욕과 종족 보존 욕망인 성욕 그리고 권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재미를 추구하는 욕망으로 환원 될 수 있다고 본다. 인간 삶의 동력이 되는 것은 이 세 가지 욕망이며, 이 세 개의 동력에 의해 인간 삶의 요란스러운 희비극이 빚어진다. 이 세가지를 포함해 모든 욕망을 쇼펜하우어는 ‘살려는 의지’라고 부른다.

그러나 사랑에 빠질 때 우리는 사실 성욕이라는 육체적 욕망에 지나지 않는 것에 지나치게 신성한 색채를 부여하기 때문에 남녀 간의 사랑은 희극적인 성격을 갖는다. 사랑에 빠진 사람이 상대방을 턱없이 미화하면서 상대방과 결합하면 온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기뻐하고 자신이 이제 무한한 행복을 누릴 수 있으리라는 망상에 빠진다. 이러한 망상으로 인해 사람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상대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 온갖 노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종족의 의지가 충족되면 망상은 홀연히 사라지고 그 사람 옆에는 지긋지긋한 인생의 짐으로서 평생 먹여 살려야 할 처자만이 남는다.

개체들의 삶이란 한없는 결핍감과 무한한 노고의 연속이다. 이렇게 모든 개체가 한없는 결핍감에 사로잡혀 욕망에 쫓기면서 그러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서로 투쟁하는 모습이 우리가 사는 세계의 실상이다.

극렬한 인간 혐오, 인간보다 개가 낫다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는 염인주의, 즉 인간을 혐오하는 사상과 통한다. 쇼펜하우어의 인간 혐오는 극렬한 것이어서 인간보다 개가 더 도덕적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다. 쇼펜하우어는 평생을 결혼도 하지 않고 개 한마리와 함께 살았다.

‘인간은 혼자 있으면 외로움에 떨면서도, 함께 있으면 서로를 찌르는 고슴도치 같은 구제 불능의 존재다.’ 쇼펜하우어가 인간에 대해서 내린 정의다.

사회는 불과 비교 될 수 있다. 영리한 자는 적당한 거리에서 몸을 녹이지만, 어리석은 자는 불을 거머쥐려고 한다. 그는 불에 댄 후 춥고 외로운 곳으로 도망가서는 불이 뜨겁다고 징징거린다.

우리는 자신의 타고난 성격을 인식하려고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많은 경험과 시행착오가 필요하다. 올바르게 인식된 성격을 쇼펜하우어는 ‘획득 성격’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획득 성격에 따라 사는 사람은 자신의 성격을 잘 인식하고 있어서 변덕스러운 기분이나 외부의 부추김 등으로 동요되어 자신의 성격과 배치되는 쪽으로 행동하는 것을 피할 수 있다. 그는 획득 성격에 근거하여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살면서 후회 없는 삶을 산다.

쇼펜하우어는 성격을 고치려는 것은 ‘자신의 성격에 구현되어 있는 예지적 의지, 즉 물자체로서의 의지를 거스르려는 의지’를 행사하는 것으로 본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의지가 자신에 대해서 모순된 행위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성격을 알고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 자신에게 만족하면서 살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인간의 생각이나 행동이 인류로서의 종적인 성격이나 개인적인 성격에 의해서 좌우되기 쉽다는 사실을 잘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더 온유하게 대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의 행위로 인해 분노에 사로잡혔다가도, 우리는 그 사람의 성격을 이해하면 어느 정도 분노를 가라 앉힐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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