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욕망의 존재이기에 고통스럽다
쇼펜하우어 2부 고통의 늪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행복을 위한 세 가지 조건
내적인 재보 중에서도 행복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명랑한 마음이다. 다른 재보가 없이도 이 명랑한 마음만 있으면 저절로 즐거워지기 때문이다. 명랑한 사람들에게는 항상 즐거워할 만한 원인이 있다. 그 원인은 그가 명랑하다는 것이다. 명랑한 마음이라는 재보는 어떤 재보로도 바꿀 수 없기에 명랑한 마음에 필적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낙관적이고 명랑한 성격의 소유자는 사소한 것에도 기쁨을 느끼기 때문에 그가 일생에 걸쳐셔 느끼는 행복의 총량은 비관적이고 우울한 성격의 소유자보다도 훨씬 더 크다.
정신이 저열하고 빈곤한 자들의 행복은 감각적인 쾌락이나 평범한 가정생활이나 유치한 사교 등에서 얻는 즐거움을 넘어서지 못한다. 이에 반해 가장 고상하고 미묘하며 오래 지속되는 쾌락은 그것을 즐길 수 있는 정신 능력을 갖춘 소수의 정신적 귀족에게만 허용된다.
부라는 것은 덧없기 짝이 없다. 부자들은 평생 모은 재산을 죽음과 함께 결국은 상속인에게 넘겨야 한다. 따라서 실은 그들은 잃어버리기 위해 돈을 벌고, 빼앗기기 위해 돈을 모은 것일 뿐이다. 그들은 영리한 자들처럼 보여도 결국은 어리석은 미치광이들과 다를 바 없다.
부와 마찬가지로 명예도 그것에 대한 욕망이 지나치면 정신을 산란하게 하는 번거로운 짐이 될 수 있다. 우리에게는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듣고 싶어하는 허영심이 있으며, 다른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들으면 설사 빈말일지라도 매우 기뻐한다. 이는 고양이가 등을 어루만져주면 좋아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허영심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남의 눈치를 본다. 인생의 많은 고민은 남들이 나를 무시하는 듯한 말과 행동 때문에 생긴다. 우리가 이렇게 타인의 반응에 신경을 쓰는 것은 자신에 대한 긍지, 즉 자존감이 약하고 내면에서 자신에 대한 불안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이 끊임없이 노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숱한 어려움과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얻으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타인으로부터의 좋은 평가다. 잘했다는 칭찬을 받고 유능하다는 인정을 받기 위해 대부분의 노력을 소모한다. 사회적 지위, 칭호, 훈장을 받으려는 노력은 물론이거니와 재산을 늘리고, 심지어는 학문과 예술에 쏟아붓는 노력까지 그 모든게 궁극적으로는 사회적 존경을 얻기 위한 것이다.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은 존재인지 알겠는가? 핞심하기 그지 없는 존재가 바로 우리 인간이다.
인간의 행복은 부나 명예와 같은 외부적인 것보다도 성격이나 건강처럼 자신에게 속해 있는 것에 달려 있다. 특히 건강은 행복을 위한 기초에 해당하는 것으로써 건강한 거지는 병든 제왕보다 더 행복하다.
행복하기 위해서 필요한 또 하나는 자신의 성격에 맞는 일과 생활을 하는 것이다. 헤라클레스처럼 폭발할 것 같은 엄청난 힘을 가진 자가 집안일이나 세심함을 요구하는 수공업에 종사하거나 학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면 그는 질식해서 죽어버릴 것이다.
고통을 삼키고 삶과 화해하는 법
우리가 어떤 재앙을 참을 수 없는 이유는 많은 경우, 자신이 그러한 재앙을 겪지 않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는 왜 다른 사람이 아니고 하필 내가 이러한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 하고 억울해 한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우리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이 일어나도 그것이 우주의 대의지에 따라서 일어났을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한다.
격렬한 기쁨이나 슬픔은 현재 자신이 실제로 느끼는 즐거움이나 괴로움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고, 미래에 대한 지나친 기대나 걱정에서 비롯된다.
괴로운일이 생겨도 / 그대의 영혼은 항상 침착할지어다 / 행운이 그대를 찾아올지라도 / 환희에 빠지는 / 수치스러운 일이 없도록 하라
아름다움은 우리를 욕망에서 벗어나게 한다
이성이 욕망을 위해서 일하던 상태에서 벗어나서 사물과 세계를 호젓하게 관조하면 사물과 세계는 아름답게 나타난다. 이와 동시에 우리 마음에는 저절로 평안이 깃든다.
에피쿠로스는 인간의 행복은 욕망을 만족시키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데서 생긴다고 보았다.
심미적 관조의 대표적인 것이 예술이다. 예술적 인식은 일상적 인식이나 과학적 인식처럼 욕망의 수단이 아니다.
그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욕망을 자극하고 흥분시키는 것들이다. 따라서 순수한 인식이 아니라 행동하거나 반작용하는 것이 그들의 삶에서 하는 유일한 것이다.
위대한 천재가 합리적인 사고 능력을 탁월하게 갖는 경우는 드물다. 오히려 천재적인 사람들은 자주 격렬한 감정과 비이성적인 정열에 따라서 사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것은 이성이 약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그 천재적인 개인과 그의 격렬한 의지를 통해서 전체 의지 현상의 비상한 에너지가 표출되고 있기 때문이다.
동정심, 우리는 모두 하나라는 직관적 인식
인간의 모든 행위는 다음 세가지에 뿌리를 두고 있다. 첫째는 자신의 이익을 원하는 이기심, 둘째는 타인의 불행을 바라는 잔인한 악의, 셋째는 타인의 행복을 원하는 동정심이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이 세 가지 원천 중의 하나 혹은 둘에서 비롯된다.
사람들에게 잠재된 동정심을 일깨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도덕적인 훈계를 하거나 추상적인 도덕 이론을 설파하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선한 사람들의 전기라든가 일화를 들려주는 것이다. 이는 화가가 미학 이론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보다 훌륭한 화가들의 그림을 보면서 자신을 개선 해 나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아무런 조건 없이 자신을 희생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감동하고 자신을 돌이켜본다.
욕망으로부터의 영원한 해방
쇼펜하우어는 모든 고통이 살려는 의지에서 비롯되는 고통의 극복은 살려는 의지의 부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자신의 사상이 그리스도교의 진정한 가르침과 일치한다고 본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그리스도교의 핵심을 이루는 진리는 원죄설과 구원설이다.
생이 ‘악몽’이면 죽음은 ‘축복’이다
개체의 출생과 사망은 자연 전체의 새에 속하며, 자연 전체의 생에 필수적이고 본질적인 것이다. 개체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기 몸에서 불필요한 것들을 분비해야 하듯이 자연 전체의 존속을 위해서 개체들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새로운 생명을 위해서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우리가 신체 밖으로 배출하는 물질을 아까워하지 않는 것을 고려한다면, 개체들의 죽음도 더 높은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일종의 분비에 불과한 것이므로 두려워할 필요가 업다. 개체들의 생은 사라지지만 자연전체는 개체들의 죽음을 바탕으로 하여 계속 된다.
Q/A 묻고 답하기
몇 명의 장관이 지도 위에 머리를 맞대고 영토나 주민들에 대하여 논쟁하는 것을 우리는 대단한 행위로 본다. 그러나 그것은 서민들이 술집에서 카드나 트럼프의 승부를 놓고 아옹다옹하는것과 본질에서 동일한 행위다. 이는 금으로 만든 장기 말들로 장기를 두는 것이나 나무로 만든 장기 말들로 장기를 두는 것이나 본질적으로 같은 것과 마찬가지다.
무엇보다도 니체는 인간과 세계의 심연을 드러내려고 하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당시의 인간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인간상을 제시한다고 보았다. 니체는 당시의 인간은 기계적으로 노동하면서 노동이 끝난 후에는 찰나적인 쾌락과 안락만을 추구하는 천박하고 동물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보았다.
나가는 글 내 안의 유령들 떨쳐내기
세상이 헛되고 무가치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자신의 삶도 헛되고 무가치하다고 느낄 수 밖에 없다.
세상이 헛되고 무가치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세상 속에서 이루어지는 자신의 모든 생각과 행위도 무가치하고 부질없는 것으로 느끼면서 자기혐오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이런 사람은 세상에서 직업을 갖고 가족을 건사하는 활동을 하지만 그 모든 활동을 무의미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실직적으로는 세상과 담을 쌓고 자신 안에 갇혀 있는 사람이다. 따라서 키르케고르는 염세주의에 빠진 사람의 정신 상태를 ‘폐쇄성’이라고 불렀다.
욕망에 사로잡혀 있을 때 다른 인간들과 세상은 우리의 욕망 실현을 위한 도구로 나타나거나 그것을 방해하는 적대적은 것으로 나타난다. 그것들이 우리의 욕망에 호응해 줄 때 우리는 즐거워하나 그렇지 않음변 불쾌해한다. 다른 인간들과 세상은 보통은 우리의 뜻대로 움직이기보다는 자기 나름의 욕망과 법칙에 따라서 움직이기 때문에 우리는 고통을 겪는다. 그러나 우리가 욕망에서 벗어나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심미적 관조의 상태에서 세상을 보면 다른 인간들이나 세상은 아름다운 것으로 나타난다. 불교 역시 우리가 욕망에서 벗어난 순수한 눈으로 세상을 보는 즉시 번뇌 세상이 열반 세상이 된다고 말한다.
쇼펜하우어 철학의 위대함은 의식과 이성을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보는 철학의 전통을 전복했다는 데 있다. 니체와 프로이트에 앞서서 쇼펜하우어는 우리의 의식과 이성이 종족보존 욕망인 성욕이나 이기적인 탐욕과 같은 무의식 차원의 욕망에 얼마나 크게 지배받는지를 폭로했다. 쇼펜하우어의 이러한 폭로가 종종 인간에게 존재하는 선한 면이나 인간들 사이에 존재하는 우호적이고 협조적인 면을 전적으로 무시하는 극단적인 면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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